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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30 - [주저리주저리/리뷰] - [영화] 결정론, 인식론, 주지주의, 주의주의로 바라본 매트릭스(The Matrix)
영화 매트릭스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이어서 쓰겠다.
진실은 실재하는 것인가? 믿어지는 것인가? The Matrix is everywhere.
현실의 진정한 본질이 꼭 사람들이 보기 원하는 어떤 것이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현실(REAL)은 우리가 차라리 거부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현상들을 담고 있다. 죽음, 고통, 무의미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의 이러한 측면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본래성을 성취하려면 우리가 편안하게 느끼는 것들만이 아니라 현실의 모든 측면을 인정해야 한다. 실존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의 힘든 진실들을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비본래적으로 살아간다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일련의 거대한 거짓말로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한다. 이러한 거짓말은 거대한 거짓말에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우리가 원하는 선의의 거짓말들이다.
가상현실 매트릭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 자신을 알라'를 열망하는 대신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회피하고 허상을 믿는다. 그렇기에 인공지능 기계가 만든 꿈의 세계(매트릭스를 통해 보여지는 1999년의 영상을 말함)에 남는 것을 택한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말한 대사를 살펴보면,
"매트릭스는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지. 심지어 이 방안조차. 창밖을 내다 보거나 티브이를 킬때도 넌 그것을 볼수 있지. 일하러 갈때도, 교회를 갈때도, 세금을 낼때도 넌 그것을 느낄수 있다. 그것은 너의 눈을 진실로부터 가려온 세상이다."
매트릭스는 사전에 조직된 절차 혹은 통제 그자체를 말한다. 예를 들면 국가시스템, 학교운영시스템 등이 있다. 영화에서는 문을 여는 장면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각방의 문을 열때마다 그 방에 해당하는 매트릭스(통제시스템을 의미)가 존재한다. 매트릭스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억제하고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무슨 진실이냐면,
"네가 노예라는 진실. 다른 사람들처럼 너는 노예로 태어났다. 냄세도 맛도 감각도 느낄수 없는 감옥에서 말야.(bondage, 속박된 상태로 태어났음을 의미) 니 마음을 위한 감옥이지.(A prison for your mind) 아무도 매트릭스가 뭔지 말할 수 없어. 너가 직접 봐야해."
만일 모든 것이 기계에 의해 날조된 허상이라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과 지금까지 경험했던 모든 것, 심지어 우리가 기본적인 논리적 진리라고 여기는 것조차도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가상세계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매트릭스 속에서 던지고 있는 물음은, 데카르트가 이야기했던 '악령의 기만'과도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는 <성찰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꿈속에서 당신은 자신이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당신은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최고의 힘과 꾀를 가진 악령이 나를 속이기 위해 그의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다고 가정해보라."라고 말한다. 위에 써진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말한 대사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만들어진 것에 순응하며 살것인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것인가.
매트릭스는 가상현실이며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당신의 눈을 가리는 세계이다. 그것은 특정 부분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완벽하게 현실 같아서, 그곳에 접속되어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매트릭스 세계를 진짜라고 믿는다. 현재 그들 앞에 보이는 현실은 너무도 유혹적이어서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그것이 진짜라고 믿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환상 세계(허상)보다는 실제 세계(현실)를 선택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가치 있는 유일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사회’이다. 노예들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때라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만약 자신의 노력 없이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들은 노예 상태로 다시 전락할 것이다. 칸트는 우리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자기 해방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발견해야 할 운명인 것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 통제 시스템은 공공성, 편리성, 편의성, 복지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사회의 시스템이 그렇지 않다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힘들고 어렵지만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를 바꾸어 나갈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적절히 타협하여 순응할 것인가 문제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는 출발점이다.
배부른 돼지를 원하는가?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길 원하는가?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사이의 선택은, 진정성 있는 삶과 비진정성의 삶 사이에 놓인 인간의 실존적 선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 진정성의 삶은 개인이 인간 조건의 참된 본질을 알고 있는 상태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현실은 암담하다. 네오와 모피어스를 비롯한 전사들은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인 식욕도 제대로 충족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영양소가 다 들어있다고는 하지만 희어멀건한 죽을 먹고, 낡은 옷을 입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이러니 사이퍼가 울분을 터트릴만하다. '왜 내가 빌어먹을 빨간 약을 먹었을까?'하고 후회하던 사이퍼는 스미스 요원과 만나 매트릭스에서의 배우 같은 삶을 보장받고, 동료들을 배신한다. 결국 사이퍼는 희어멀건한 죽 대신 스테이크를 택한다.
사이퍼는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내가 이걸 입 속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나의 뇌에다 이게 아주 부드럽고 맛있다고 말해준다는 걸 알고 있다고. 9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에 내가 깨달은 게 뭔지 알아? 무지가 바로 행복이라는 거야. "
물론 그의 행동은 비난해도 마땅하다. 하지만 사이퍼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감각적 쾌락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인가, 배고픈 인간이 될 것인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선택하겠지만, 현실에선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도덕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게 나으며 만족한 바보가 되느니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게 낫다.”는 사실 이상적인 이야기이다. 만약 내가 사이퍼의 상황에 처해있었다면, 나는 사이퍼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확신이 없다. 기본적인 욕망들을 제한 받으며 네오와 같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자본주의
사이퍼는 자신이 먹고 있는 스테이크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마르크시즘 용어로 말하자면 사이퍼가 먹고 있는 스테이크는 상품이다. 그리고 사이퍼가 갈망하는 행복은 ‘상품물신주의’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 체제속에서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과 그들이 생산하는 자본과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며 자유시장속에서 자발적인 노동을 행사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강제노동에 착취당하고 있는 현실에 놓여있다고 한다. 이는 곧 노동착취현상을 일컫는데, 자유시장속에서 개인이 노동을 수행하는 이유가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든 이상을 쫓기위한 열정이든간에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노동은 자본가에겐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고 자본가는 잉여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노동자에게 그들의 노동에 대한 1:1 가치를 지불하지 않기에 이는 곧 착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즉 세상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구매하는 상품들을 물신화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버는 돈으로 우리가 구입하는 물품은 노동자들에 의해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다. 우리는 노동 착취가 자행하는 아시아의 공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노동의 시스템을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알고 무시하든 모르고 무시하든, 우리들 대부분은 정도는 다를 지라도 ‘상품물신주의’를 실천하며 산다.
▲ 검은 폭풍 프로젝트
애니 매트릭스 《제2의 르네상스》를 보면, 기계들의 에너지원을 끊기 위해 검은 폭풍 프로젝트로 태양열을 차단시킨 인간들은 결국 기계들과의 전쟁에서 패한다. 그리고 검은 폭풍 프로젝트는 인간 세력들의 자충수가 되었는데, 기계들은 태양열 대신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계 세력은 거대 자본, 자본가를 대표하고, 인간 세력은 노동력, 노동자를 대표한다.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행위는 잉여노동에 의한 착취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공자공에 연결된 케이블을 통해 주입되던 영상 신호(매트릭스 1999년의 가상세계를 보여주는 영상)는 노동을 착취당하는 현실을 노동자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주입시키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인공자궁에서 폐기되는 장면을 살펴보자. 인공자궁에서 깨어나 주변을 둘러보는 네오는 진실을 깨달은 노동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리고 기계가 깨어난 네오를 보고 폐기장으로 버리는 장면은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인식이 깨어있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관을 통해 내려가는 장면은 모피어스가 말한 대사처럼 깊은 토끼굴을 내려가는 느낌(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도 들고 마치 변기 내리는 모습(자본에게 버림받은 모습)과도 유사하다.
항상 깨어있어라
영화에서 Wake up이라는 문장을 자주 들을 수 있다. 항상 잠에서 깨어나라는 소리를 듣는 네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어서 빨리 인식하라는 말과 같다. 성경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항상 깨어 있으라.' 즉,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각성상태에 있으라는 말이다.
▲ 예언자 오라클
영화에서 자각 혹은 인식은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모피어스는 자기가 메시아라는 걸 믿지 못하는 네오를 자각시키기 위해 메시아 감별사인 오라클에게 데려간다. 오라클은 인간에게 신의 말을 전하는 메신저다. 신의 대변인이자 예언자인 셈이다. 인간이 답을 찾을 수 없는 난제에 부딪치면 오라클은 신전에 나아가 신에게 답을 구한다. 그리스인들은 델피(Delphi) 신전에서 신탁하고 델피 신전의 오라클을 통해 신의 계시를 기다렸다.
영화 속 오라클은 네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너는 이미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나에게 물으러 온 것이다. 메시아가 되기로 예정된 운명은 없다. 네가 운명적인 메시아는 아니다. 그러나 네가 메시아가 되겠다고 이미 선택했다면 너의 선택에 믿음을 가져라. 그리하면 너는 메시아가 될 것이다. "
믿음을 가지라는 애매한 말만을 남긴 것이다.
▲ 오라클을 찾아간 네오가 바라본 문구, 라틴어로 테메트 노스케 즉, '너 자신을 알라'라고 쓰여져 있음.
오라클의 난해한 가르침을 받은 네오의 눈에 부엌에 걸려있는 '테메트 노스케(temet nosce)' 액자가 들어온다. ‘테메트 노스케’는 우리말로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이다. 흔히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지는 격언이다. 더 정확히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전인 룩소르 신전(Luxor Temple) 외벽에 새겨졌던 격언이라고 전해진다. 그 연원이 어지러운 만큼 ‘너 자신을 알라’는 짧은 가르침은 참으로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의적이다. 이는 절대적인 신에 복종해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로 이어져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자아의 탐구정신을 의미하게 되었다.
위 사진 속 현판 문구는 자각 혹은 인식을 의미한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매트릭스에 의문을 제기하고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면서, 나 자신애 대해 찾아가는 행동을 보여준다. 엔더슨은 기업의 구성원으로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로 살아간다. 하지만 뒤에서 해커 활동을 하며 사회에 도전한다. 모피어스와 트리니티를 만나면서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매트릭스에 의한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가 알고 있던 세계가 깨지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또한 오라클을 만났을 땐 자신이 구세주인지 아닌지에 대해 스스로 묻게 된다. 우리말로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의 이 한문장이 네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준다. 영화 매트릭스는 우리에게 네오의 끊임없는 자문자답과 선택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너 자신을 알라고, 지혜에 대한 갈구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이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
매트릭스의 세계관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동굴 속에 묶여 벽만 보고 살고 있는 죄수들이 있다. 희미한 빛을 통해 죄수들은 그림자만 보고 살아간다. 그래서 동굴 벽 안의 그림자가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중 한 명이 그림자의 원인인 횃불의 존재를 알게 되고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빛을 마주하며 진짜 현실과 직면한다. 그리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진짜 현실을 이야기해주지만, 사람들은 믿지않고 그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깥의 태양빛에 익숙해져서 어두운 동굴 안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그를 탄압한다.
동굴 안은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이다.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 인신론 철학 용어로는 현상을 뜻한다. 하지만 동굴 밖으로 나가 진실과 직면한다. 동굴 밖은 완전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진리의 세계이다.
영화 속에서 앤더슨이 프로그래머 직업을 가지며 생활하던 현실은 동굴 안이다. 그리고 앤더슨이 아닌 네오라는 이름을 가지고 진실과 직면하는 것은 동굴 안에서 동굴 밖으로 인식을 넓혀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동굴(매트릭스 하에서의 가상세계)에서 끌어내 현실(1999년이 아닌 2199년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단지 기계의 에너지원이라는 끔직한 진실)을 보게 한다. 「 데미안」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네오는 동굴 안에서 동굴 밖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기위해 하나의 알을 깨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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