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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전세계 오늘의 역사] 7월 26일

by 돈버일하 2017.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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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년 전 오늘의 역사

7월 26일은 라이베리아의 독립기념일이다.  

1887년 - 자멘호프(사진)가 ‘에스페란토 박사’라는 필명으로 《국제어》를 출간하다. 
1945년 - 독일의 포츠담에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다.
1950년 - 한국 전쟁 중 미군의 공격으로 최소한 121명이 사망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나다.
1953년 - 피델 카스트로가 산티아고데쿠바 근처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함으로써 쿠바 혁명이 발발하다. 
1993년 -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아시아나항공 733편 여객기가 추락해 68명이 사망하다.



더 알아보기

정식 국가 명칭은 라이베리아공화국(Republic of Liberia)이다. 중서부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며 면적은 111,369㎢로 한반도의 절반 크기이다. 인구는 2012년을 기준으로 약 420만 명이다. 수도는 몬로비아(Monrovia)이다. 기후는 열대 우림 기후로 거의 연중 고온다습하며, 기온은 연중 22℃~32℃로 일정한 편이다. 언어는 영어(20%)가 공용어이며 그 외 16개 토착어가 쓰인다. 민족은 크펠레(Kpelle)족 등 16개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는 국민의 다수가 토착종교(40%)와 기독교(40%)이며 이슬람교는 15% 정도이다. 성인의 문자 해득률은 57.5%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9시간 느리다. 1820년부터 미국 흑인들이 몬로비아로 이주하였으며 1847년 7월 26일 국가를 건립하였다. 국가 형태는 공화국이고 정부 형태는 대통령중심제이다. 2005년 11월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 엘런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Sirleaf)가 탄생했으며, 2011년 11월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0년을 기준, 국내총생산(GDP)1)은 10억 달러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227달러이다. 수출은 2억 달러이고 수입은 7억 30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고무, 금, 다이아몬드, 커피이고 주요 수입품은 석유, 식품, 공산품이다. 화폐단위는 라이베리아 달러(Liberia Dollar, LRD)이다.

 포츠담선언 [Potsdam Declaration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영국·중국 3개국 수뇌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공동선언이다. 포츠담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연합국이 일본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방침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한국문제와 관련해서는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후 독립을 재확인하였다.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 [老斤里良民虐殺事件, 영어: No Gun Ri Massacre]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 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전쟁 범죄에 속한다. 노근리 학살사건을 실제 경험했던 생존피해자와 유족들인 정은용, 정구도, 양해찬, 정구호, 서정구씨 등으로 1994년에 구성된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 정은용)에서는 사망자 135명,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군인신분이라 진급실패를 우려한 가해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덮여 있었지만,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계속된 노력으로 2004년에는 사건의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의회에 참여한 국회의원 169명 전원의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경부선 노근리 쌍굴다리는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쿠바 혁명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두 차례에 걸친 무장 투쟁을 벌여 1959년 1월 1일 마침내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혁명을 말한다.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 이후 1902년 독립하였지만, 미국자본에 종속된 사탕수수 단일작물재배 경제가 형성되어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토지가 미국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독재정권의 부패도 심화되어 여러 차례의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미국의 비호하에 진압되었다.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의 주도하에서 몬카다병영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게릴라전을 포함하는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노선을 가진 ‘7월 26일 운동’이 결성되었다.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로 상륙한 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17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출발한 게릴라운동은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미국기업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단행하였다. 4월 16일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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