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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짧은 한국사] 홍경래의 난과 임술농민봉기

by 돈버일하 2017.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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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1811년, 순조

몰락 양반 홍경래 + 중소상인 + 영세농민 + 광산노동자

원인 : 서북민(평안도) 지역차별

- 중앙 관직 진출 기회 제한, 평안도 상공업 억압

'가산'에서 시작되어 청천강 이북 8군을 점령하였다.

정주성에서 관군에게 패함으로 실패함.

한계 : 영세 농민과 광산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함. 지역적으로 끝났다.(전국 확산 X , 전국적인 호소 X)


홍경래의 난 격문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와 자제, 공·사 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이 뚜렷하고 문물이 아울러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아라 말한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을 자 있겠는가.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오로지 갖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고을의 군후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천으로 남김없이 밟아 무찌르리니, 마땅히 속히 명을 받들어 거행함이 가하리라.

대원수, 「패림」


임술농민봉기 = 진주민란, 진주농민항쟁

1862년, 철종

경상도 단성→진주→전국 확산

원인 : 삼정의 문란, 자영농의 몰락


금번 난민이 소동을 일으킨 것인 오로지 전 우병사 백낙신이 탐욕을 부려서 수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병영에서 포탈한 환곡과 전세 6만 냥을 집집마다 배정하여 억지로 받으려 하였습니다.

경과 : 임술농민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농민들은 탐관오리(병사 백낙신)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했고, 유계춘(진주 농민한쟁 지도자, 향임 출신)의 지도 아래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른 이 농민군들을 초군이라 불렀다. 이 농민의 항거는 함흥~제주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조선 후기, 지방에서 민란이 발생했을 때 수습하기 위해 임시 직책을 파견되는데, 이때 인근지역의 수령이 임명되거나 경관이 임명되었다. 임술농민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조정에서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였고, 유계춘은 체포되어 1862년 효수형에 처해쳤다.

결과 : 농민의 사회의식 성장(스스로의 힘으로 사회모순 변혁시도), 농민의 항쟁(적극 + 소극적항쟁)으로 양반 중심의 통치체제가 붕괴되었고 삼정이정청이 설치( 근본적인 해결 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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